인문,경제학

[감이당] 붓다의 생애 (고미숙 선생님)

and_we_go 2023. 5. 21. 18:08

불교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 중에서도 사찰 가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게 나다. 사찰은 좋아하면서도 불교와 동양 철학은 '서양에 비해 뭔가 부족하고, 미신 아냐?'라고 생각하며, 은근한 무시가 내 인식에 깔려있었다.

그러다 작년 감이당에서 불경 수업을 처음 들으며 부처님은 특정 종교의 교주나 신이 아니고, 인간의 스승이라는 걸 알게 되면서 불교에 대해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다. 붓다가 신이 아니라면, 인간으로서 어떤 삶을 살았던 걸까?

이 수업은 1년 동안 붓다의 사상에 초점을 맞추기보단 붓다의 이야기를 풀어내며 이것이 우리들의 삶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되새겨보는 시간이다.


공부를 대하는 태도

공부할 땐 이게 내 삶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환기하면서 해야 한다. 현대 교육의 가장 큰 맹점은 자기 삶과 무관한 전문 지식(성적, 스펙 등)으로서만 공부를 대하는 태도다. 나도 당연히 인생의 절실한 문제와 연관되지 않은 공부에는 관심이 없다. 그런 지식은 정보가 흘러가는 거고, 굳이 쫓을 이유가 전혀 없다.

고미숙 선생님(감이당)

고미숙샘은 공부는 내 삶과 연결된 지식에서 시작해야 최소한 정직하게 강의나 이야기를 할 수 있기 때문에, 많은 결함이 있고 시행착오를 겪지만 본인이 하는 공부에서 스스로 믿고 검증한 것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소신이라고 하셨다.

여기서 고미숙 샘에 대한 대중의 호불호가 나뉠 수 있지만, 선생님은 본인이 믿고 검증한 공부를 바탕으로 이야기하시기 때문에 이야기와 말에 힘이 있고 진솔함 있다.

나는 고미숙 선생님을 굉장히 존경하기 때문에 선생님의 삶의 스토리도 궁금했는데 붓다 이야기를 하기 앞서, 샘이 불교를 만나게 된 스토리를 들려주셨는데, 붓다 스토리보다 재밌는 게 함정..ㅋㅋㅋㅋ 고미숙샘 강의를 들은 사람들은 알 거다. 진짜 이야기를 재밌게 하신다ㅋㅋ

불교를 만나게 된 배경과

불교를 왜 인생의 궁극의 공부라고 생각하는가?

고미숙샘은 원래 유년기부터 대학원 갈 때까진 교회를 다니셨다고 한다. (크리스찬이긴 했지만 교회의 제도권에는 관심이 없어 혼자 성경을 읽으며 그리스도적 삶을 실천하겠다고 생각하심)

대학원생일 땐 당시 시대적 흐름상 역사주의 안에서 공부를 하며, 보름 정도 시위대를 따라가면서도 '이다음에 뭐를 해야 되는 거지? 어디로 가야 되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며, 보름쯤 되던 날 '책을 한 자도 못 봤다'라는 막막함에 시위를 그만하시기로 결정하셨다고 한다.

그렇게 역사에 몰두하여 잃어버렸던 여러 질문들을 다시 만났다고 하셨다. '인간은 무슨 목표를 향해 나아가야 하지?' '우리나라가 부자가 되어 전 세계 문명을 이끌면 내가 해방이 되는 건가?'

고미숙샘은 대학원에서 조선 말기의 사설시조나 잡가를 전공하여, 연암을 공부할 기회가 전혀 없었는데 우연히 열하일기를 공부하며 연암의 삶과 글쓰기, 연암의 사유의 유동성에서 삶의 비전을 만들게 됐다고 하신다.

그 당시 공동체 생활을 하며 공동체 생활에 대해서 솔직하게 쓴 책을 냈는데, 정말 우연히 비구니 스님들과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고 그때부터 정화스님께서 한 달에 한 번씩 오셔서 불경이나 다른 걸 가르쳐주시는 인연이 만들어짐 (새로운 영성이 드러난 계기)

정화스님께 들은 이야기 중 "지금까지 얻은 걸 내려 놔야지, 다음 스텝으로 갈 수 있다"는 말이 있는데 지식이 앞으로 나아간다는 건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전제한 인식의 경계가 넘어서야 한다'는 것이 들을 때마다 충격적이라고 하셨음

그렇게 '불교는 경계를 넘어가는 것에 대한 앎'이고, 이런 식의 통찰이라는 걸 계속 귀로만 15~20년간 들어오셨다고 한다.

연암을 만나 삶과 글쓰기, 삶과 앎의 간극을 줄이는 건 알겠는데 이 사이에 '몸'이 없었기 때문에 균열이 있어서 동의보감과 의역학을 읽고 나니, 운명과 마주할 수 있는, 생과 사의 경계를 넘어갈 수 있는 앎의 영역, 통찰의 영역으로 당연히 시선이 가며 불경 세미나를 시작하셨다고 한다.

사주 명리학으로 보면, 샘은 대운이 바뀌는 시기마다 새로운 공부들을 만나셨다고 한다. 우리도 분명 내적인 변화가 있었을 텐데 스스로 깨닫지 못한 걸 거라고 하셨다.ㅎㅎ우리는 보통 '돈'을 기준으로 대운을 판단하기 때문에.

샘은 공부를 할 때, 원대한 지평선이 있어야 한다고 하셨다. 티벳 불교나 불교사가 워낙 광범위하여 사람들은 '어떻게 공부해?"라고 할 수 있지만, 아무리 해도 도달할 수 없는 지평선이 있어야 허무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하셨다. -> 이건 아직 내가 잘 모르겠다. 도달할 수 없으면 더 허무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기도 한다.

붓다의 평등이란 태어난 이상 누구나 깨달음의 포텐셜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근데 우리 스스로가 거부한다는 것이다. 욕망과 쾌락에 더 머물고 싶기 때문에.

불경에서 말하는 공사상이나 진리, 도는 우리와 거리감이 있고 종교적인 견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양자역학이 밝혀낸 개념들이 불성과 거의 같은 개념이라고 한다 (그래서 내가 양자역학을 조금이라도 알고 싶어졌다)

붓다의 생애

1. 특징

붓다의 생애 특징 첫 번째는 굉장히 심플하고 단순하다는 것이다. 다른 종교 지도자들과 비교했을 때 어찌 보면 밋밋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단순하다.

탄생 → 출가(29살) → 6년간 고행 → 성도(35살) → 45년간 설법 → 열반(80세)

두 번째 특징은 연대기적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30대에 설법한 내용 40, 50대에 설법한 내용 등에 차이가 전혀 없다. 이는 35살에 깨달음이 "무상정등정각"이라는 것이다. 즉, 이미 그것의 위가 없으며 구경의 경지라는 것이다. 따라서 세속적인 연대기에 따른 굴곡과 변화가 없으며 오로지 만나는 대상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설법을 하셨다.

세 번째는 생애 스토리가 전부 다르게 구성됐다는 것이다. 약간의 시간적 차이는 존재하지만 그 안의 스토리가 전부 다르다. 어떤 사람은 종교적이거나 신화적인 차원을 아예 제거하고 구성해도 '인간이 이렇게 살 수 있나?'싶을 정도의 느낌을 준다.

2. 시대 배경적 상황

부처님이 활동한 시대는 B.C 5세기인데, 중국에선 공자, 노자, 지중해에선 소크라테스가 활동한 시대다. 인류에게 '내면의 해방'을 향한 길을 알려주는 현자들이 등장했다.(축의 시대)

그전까지는 욕망의 발산, 외부를 확장함으로써 자유와 행복을 얻기 위해 싸웠다면, 외부에서 내부로 방향을 돌려서 정복과 침략이 아니더라도 나를 해방하고 타인을 해방할 수 있다는 길이 열린 시대였음

3. 부처님의 탄생 전 이야기

부처님의 전생을 다룬 경전이 <본생경>인데, 부처님의 생애를 탄생에서 시작하지 않고, 이전의 생애에서 시작한다. 부처님은 수없이(인도의 수적 개념으론 수억겁번?) 거듭 태어나서 이번 생에 싯다르타 왕자의 몸으로 태어나셨다.

본생경의 이야기가 진실이냐 허구냐의 문제보단, 우리는 진실이고 거짓이고 이런 이야기 자체를 생성해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생성의 구조가 놀라운 것이다. 따라서 진실 여부에 초점을 맞추기보단 이 이야기로 어떤 사유를 했는지 보는 것이 좋다.

부처님의 전생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스토리가 수메다 수행자로 태어났을 때의 삶이다.

수메다는 엄청난 부자의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엄청난 재산의 목록을 보며 '수많은 재산을 쌓았는데도, 내세의 길을 떠날 때 한 푼도 가져가질 못하는구나'를 생각했다. 그러고선 '나는 죽음에 이르렀을 때 다음 생을 위해 가져갈 수 있는 것을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우리도 죽음을 맞이했을 때 다음 생에 유용한 것이 뭐가 있을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

수메다는 모든 재산을 왕과 헌납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모두 나눠주며 수행을 하던 중에 연등불이라는 부처님을 맞이하고자 드릴 게 없어서 진흙 길에 몸을 눕히고 머리를 풀어서 자기 등을 밟고 가라는 공양을 드렸다. 연등불은 수메다에게 '다음 생에 부처가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이 마음이라면 부처가 될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 lucija_ros, 출처 Unsplash

4. 부처님이 계속 태어나신 스토리의 핵심

수메다 행자 이후에도 부처님은 계속 태어나고 또 태어나신다. 이 이야기들의 핵심은 "모든 것을 보시하는 것"이다. 재산은 물론이고 자기 목숨도 보시한다. 굶주린 동물들에게 내 몸을 고깃덩어리로 보시하고, 게송을 듣기 위해 몸이 찢겨도 감내한다. 이 과정은 까르마의 해체이다. 까르마를 해체해서 자아를 완벽히 내려놓는 것이다. 하지만 부처가 된다는 건 재산, 나의 신체에서 더 나아가 "자아를 해체하는 것"이다. 몸과 재산을 버리는 것보다 훨씬 구경의 경지라고 할 수 있다.

부처님은 도솔천에서 '드디어 깨어날 때'가 됐다며 붓다의 몸으로 이 생에 오신다. 이때 붓다는 자신의 탄생을 '스스로 결정'하여 태어난다. 이것은 그동안 쌓은 공덕과 보시의 결과이다.

이런 이야기를 단순히 신화라고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우리는 "우리가 어디서부터 왔는지를 모른다"는 것과 "태어날 때 얼마큼의 결정권을 가졌을까" "이 생에 대해서 명징하게 알고 왔는가?"에 대해서 스스로 질문해보고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로 생각해 보는 것이 좋다.


머리로 생각해 보면 재산과 몸은 보시할 수 있다 치더라도, 자아를 해체한다는 것은 어떤 경지일까? 아예 감조차 잡히지 않는다. 하긴, 감이 잡히면 그게 깨달음의 경지일까.

고미숙샘도 불경을 만나는 데까지 언 15-20년이 걸렸다고 하셨다. 지금 당장 내 앎과 삶이 일치가 되지 않는다고 공부를 놓아버리지 말자.

우리는 죽고 나서 이 생에 있던 무엇도 가져갈 수 없다는 걸 안다. 그러면서도 현재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증식을 멈추지 못한다. 나는 어디까지 버려야 하는 것일까? 아니, 어디까지 버릴 수 있을까?

21년 3월에 쓴 블로그